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와라 간지 (문단 편집) == 군 예편 이후의 삶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nji_Ishiwara.jpg]] || || 1945년의 이시와라 간지 || 그러나 제2차 만주국 5개년 계획은 없었다. '''[[태평양 전쟁|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사와라 간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반세기나 일찍 전쟁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이사와라가 예상했던 '''[[핵무기|단숨에 대도시나 나라 자체도 한 방에 부숴버릴 결전병기]]는 [[미국|그당시 산업력과 과학력이 가장 강한 나라]]가 개발해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일본에 사용했다.]]''' 결국 일본은 패망했고, [[만주국]]은 멸망했다. 퇴역 후 이시와라는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2년간 군사학을 가르쳤지만 그를 위험분자라고 판단한 도조의 명을 받은 육군 [[헌병|헌병대]]와 [[특별고등경찰]]이 그를 감시했고 학교에 압력을 가하여 그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과달카날 전투]] 직전, 당시 해군 대좌였던 [[노부히토|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이 리츠메이칸 대학에 있던 이시와라 간지를 방문해 지구전으로 변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의견을 물었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 전쟁의 승부는 이미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다. 일본군의 작전은 이미 [[공세종말점|공격중단점]]을 넘어버렸다. 전투력은 원칙적으로 근거지부터 전장까지 거리의 자승에 반비례하므로 지구전을 수행하려면 시작부터 반드시 공격중단점을 확정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지나(중국)사변부터 이번 전쟁에 이르기까지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도조가 일으킨 이 전쟁은 완전히 말도 안되는 전쟁이다. 도대체 실패할 것이 뻔한 전장에 부대를 파견하는 바보가 어디에 있는가? 그에 대한 해답으로 그는 다음과 같은 전략을 해군에 건의했다. >현대전은 제공권이 없으면 재해권을 장악할 수 없다. 지금 제공권이 이미 상대방에게 넘어간 상황이므로 아군은 즉시 과달카날 섬에서 철수해야 하며 육군도 즉각 솔로몬 군도와 비스마르크 제도 및 뉴기니를 포기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아군이 보급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쪽으로는 버마의 국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중부에서는 필리핀을 포기하고 싱가포르와 수마트라를 중심으로 하는 자원지대를 견고히 유지하며, 또한 본토 주위의 사이판 섬, 티니안 섬과 괌 섬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해야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이것도 일시적인 대책으로 전쟁의 최종적인 패배를 막을 수 없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의 제안은 끝내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육군은 도조를 '도조 상등병'이라고 조롱한 이시와라의 의견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으며, 해군은 만약에 육군이 다른 경우가 없으면 소련과 전쟁할 궁리를 할 것을 두려워 하였고 그리했다가 육군이 군사예산을 독점하는 것을 막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저술인 세계최종전쟁론은 한국에서는 2015년 9월 [[길찾기]]에서 출간되었는데 부제인 '만주국을 세운 이시와라 간지의 망상이론'에서 보다시피 그의 '망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보기 위해 번역 후 출간된 것이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책이다. 뜬금없지만 이시와라가 예언한 세계최종전쟁이 일어난다던 60년대에 실제로 날뛰던 무뢰배 무리들이 있었는데, 바로 극좌파인 [[적군파]]다. 게다가 이놈들은 대전략 수립 부문에서 이시와라 책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았다. 뭔가 위험한 사상을 가진 군인은 잘리게 되어 있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 하던 간지가 잘리고 만 것은 당연한 결과인 셈. 하지만 이시와라의 경우는 자른 놈들이 더 위험한 놈들이었다는 게 재미있는 부분. [[도조 히데키]]에게 반대하고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정작 민간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막상 [[도쿄 전범 재판]]에 전범으로 기소되기는 커녕[* 참고로 같은 시기 만주군 참모로서 만주사변에 관여했고 나름대로 친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싱가폴에서 체포되어 이후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만일 이시와라가 저런 짓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면 이타가키와 같이 사형당했을 지도 모를 일.], 증인으로 출석하여 도조에게 불리한 증언을 잔뜩 하고 패망으로부터 정확히 4년 뒤인 1949년 8월 15일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일련종의 매장시설에 묻혔다. 다만 종전 이후에는 그의 〈세계최종전쟁론〉이 의미를 많이 잃었기에,[* 스스로가 예언한 1966년보다 25년이나 빨리 미국과 전쟁이 났다.] 주장이 수정되었는데 어찌보자면 이 최후의 수정이야말로 그의 사상이 (긍정적 의미로) 완성된 도달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뒤의 발언들은 〈세계최종전쟁론〉 한국어 번역본에 첨부된 보론(인간 이시와라 간지)에서 발췌하였다.] >일본은 헌법 제9조를 중시하며 몸에 무기로 불릴만한 조그마한 쇳조각 하나 지니지 말고 양대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분쟁을 방지하여 최종전쟁이 일어나는 일 없이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들은 중국을 지배하게 되는 세력이 국민당이나 공산당 중 누가 되더라도 항상 중국과 협력하여 동아시아적 지도 원리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작지만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도조는 사상은 커녕 생각 자체가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 대립은 성립하지도 않았다. >---- >세계최종전쟁론 159페이지, 이시와라 간지. 또한 전범재판 당시 증인으로 증언하기에 앞서, 중국 충칭 통신특파원으로 현지에 도착한 기자로부터 취재를 받은 적이 있는데, 여기서 기자가 "만주국의 운영은 만주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일본인들이 통제한 괴뢰정권 아닙니까?" 라고 묻자, 괴로운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마음에 그리던 이상향으로 만들기 위해 착수했던 만주국 건국이 나와 같은 이상향에 대한 뜻을 품지 않은 다른 일본인들에 의해 근본적으로 짓밟혔다. 그 때문에 내가 만주에 살던 중국인들에게 했던 약속을 배신하는 결과를 내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당연히 전쟁범죄자라고 할 수 있다. 독립에 협력해주었던 중국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며, 우리와 함께 만주국을 이상향으로 만드려 노력했던 이들에 대해서 중국 정부도 이해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다음은 일본의 국회의원인 타케다 쿠니타로의 증언이다. >이시와라 장군은 일본이 과거 침략전쟁을 반성하고 사과하면서, 군대를 갖지 않기로 한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국가들이 신뢰할 수 있는 평화국가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책임에 대한 어느 정도의 회피 의도는 있을 수 있고, 여전히 망상형 이상주의자적 면모가 남아있지만, 자신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 인정했다는 면에서는 다른 가해자들보다 횔씬 나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가지로 반성의 기색을 보였는데, 1937년에 자신이 총리 입각을 방해했던 [[우가키 가즈시게]]를 찾아가서 사과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보론의 저자는 블로그에 '이시와라 간지가 가장 행복한 이유는, 1차 사료로 이시와라 간지를 욕할만한 사람들이 죄다 전범이 돼 죽어버렸기 때문에 남아있는 1차 사료의 대부분이 이시와라 간지를 존경한 사람들이 쓴 글들이라는 점'이라고 작성하여 무조건적인 긍정은 위험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